진보와 보수, 여성과 인종, 자유와 권력, 투명성과 비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정치가 힐러리의 딜레마
“내가 살아온 내내 미국인은 힐러리 클린턴을 두고 논쟁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공직 생활을 그렇게나 오랫동안 하면서 살아온 여자가 여전히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칼럼니스트 카사 폴리트가 서문에 쓴 문장은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미국의 시선과 딜레마를 응축해 드러낸다. 남편 빌 클린턴과 함께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대중의 호기심과 사랑과 편견을 동시에 받아야 했던 힐러리는 늘 논쟁의 대상이었다. 빌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세기의 추문을 일으키고도 극복하고 재선에 성공한 반면, 힐러리는 남편을 등에 업고 끊임없이 권력을 노린다는 혐의와 언론의 온갖 성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힐러리의 중도 실용주의 노선 또한 논쟁의 중심이었다. 국무부 장관으로서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뒤 힐러리는 대중으로부터 아직까지 비난을 받고 있지만, 똑같이 찬성표를 던진 진보주의자 존 에드워즈 의원에게 대중은 더 관대했다. 힐러리와 오바마의 외교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전쟁과 평화’라는 상반되는 이미지로 평가되었다. 힐러리는 이중적이고 비밀스럽고 권력 지향적이라는 보편적 인식에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이 더해 남성 정치가들보다 더 가혹한 이중 잣대로 평가받곤 한다.
진보 성향인 민주당의 후보로서 힐러리는 시민과 노동자, 동성애자, 미혼모와 공교육, 보다 나은 일자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국무부 장관 시절 외교 면에서는 네오콘 입장과 같던 강경주의 노선을 보였다. 거대 기업과 금융가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후원받고 있으며, ‘트래블게이트’와 ‘화이트워터 스캔들’ 등 여전히 풀리지 않은 온갖 의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워싱턴 정가에 발을 들여놓기 전 변호사로 일할 때에도 종종 불투명한 기업가들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양극화와 불평등한 경제를 바로잡겠다는 힐러리의 선언에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보수주의 외교정책에 우호적이던 견해와 행보는 더 심각한 문제다. 힐러리는 이라크전쟁에 찬성표를 던졌을 뿐 아니라 무인비행기의 폭격과 시리아 강경 응징을 지지했다. 또한 1993년 퍼스트레이디로서 의료보험 개혁을 주도하면서 배후에 거대 보험사들의 이권을 끼고 있다는 비난을 받으며 정책 면에서도 큰 실패를 맛보았다. 그 모든 과정이 불투명했다는 지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2008년 대통령 경선 과정에서는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라는 대립 구도를 양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녀인가 잔 다르크인가? 소크라테스의 악처인가 멕베스 부인인가? 진보 여성주의자인가 보수 기득권자인가? 유능한 퍼스트레이디인가 세기의 성추문 피해자인가? 중도 실용주의 정치가인가 권력 지향 기계인가? 합리적 평화주의자인가 전쟁 지지자인가? 가난한 약자의 대변자인가 거대 기업의 검은 수혜자인가? 힐러리 클린턴의 정체성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앞으로의 미국과 세계 정치가 힐러리에게 거는 기대와 이유들
미국 정치사에서 보다 진보적이며 평화적인 노선을 구축해온 민주당은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설계할 때 군사 문제에서 곤란을 겪는다. 미국의 외교정책 및 국가안보 관련 기관들은 너무나 비대해져서 통제 불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동 및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있어서 힐러리는 분명 전쟁 지지자로서 비판을 받았으나, 보다 실무적 균형적인 차원에서 중대 업무를 수행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일궜던 미국은 오로지 미국만이 국제사회에서 최상의 도덕성과 지도력을 수행한다는 믿음을 가졌다가, 현재 그 믿음이 판 함정에 빠져 있다. 미국과 힘이 전보다 줄고 세계 문제는 점점 더 국지적이며 다변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간의 비밀주의에서 벗어나 우선 국민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칼럼니스트 아나톨 리벤은 강조한다. 미국의 영향력 약화, 관련 정책 변경이나 결정 과정, 미국 경제 모델과 기후 변화 대처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신이 무조건 인류 발전과 함께한다는 망상에 이르기까지 개편하고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외 문제에서든 복잡한 국내 문제든, 힐러리 클린턴은 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서 업무를 수행할 인재라는 평가다. 힐러리가 능력 있는 변호사이자 한 가정을 이끄는 아내이자 어머니, 퍼스트레이디뿐만 아니라 뉴욕 상원의원과 국무부 장관까지 수행한 경험과 이력에 담긴 의미를 대중은 종종 잊곤 한다.
힐러리는 늘 ‘보다 작은 발걸음들’로부터 변화가 일어난다고 믿었고 정치적으로 실천했다. 안드레아 번스타인은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복무할 당시, 작고 쉬운 변화를 중시하는 정치 스타일에 뉴욕 민주당원들이 열광했다고 표현한다. 양극화, 다변화가 심각해지는 미국 국내와 세계 정치에 중요한 부분이다. 타라 맥켈비는 ‘하드 파워’가 아니라 ‘스마트 파워’를 강조하는 힐러리의 합리적 실용주의를 높이 평가했다. 국무부 장관 당시 여성 문제, 시민과 노동자의 권리, 교육과 올바른 양육 방식을 끊임없이 논쟁의 장에 올리며 의식을 깨웠다.
힐러리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진보의 길을 선택했고, 정치적 승리와 실행을 위해 전직 대통령인 남편을 포함한 모든 모멸감을 견뎌내고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이중성과 기회주의자로 비판받는 힐러리의 진영 논쟁은 사실상 합리적 실용주의의 한계에 따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힐러리가 자유주의의 아이콘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유주의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즉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자, 어린이, 노인을 위해 싸운다. 무엇보다 그녀는 강인하며, 또 이기는 법을 알고 있다.” 미국 진보주의 센터 수장인 존 포데스타의 말이다.
이제 ‘클린턴’이라는 이름은 세기의 추문을 일으키고도 재선에 성공한 빌 클린턴이 아니라, 권력욕에 대한 혐의와 성차별 속에서 중도와 합리, 실용주의 노선을 지켜내며 이번 세기에 커다란 획을 그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