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all Keynesians now.”
1965년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다.
2008년 이 시사주간지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내놓았다.
“The Comeback Keynes”
우리는 왜 다시 케인스에 주목하는가. 1930년대 세계를 대공황에서 구해낸 천재 경제학자, 그가 오늘의 세계 경제에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케인스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명저를, 곽수종 박사의 통찰력 있는 해석으로 만난다.
“지금이 경제 불황기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로버트 스키델스키
피케티는 과연 케인스주의자인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져가면서 자본, 자본주의, 불평등, 세금 등이 일반인에게도 일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특히 2014년 하반기에 불어닥친 피케티 열풍은 세계인의 이러한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방한 기간 토마 피케티는 케인스주의자냐는 질문에 그를 존경하지만 생각이 좀 다르다고 답했다. 다만, “시장의 힘이 민주적 장치에 의해 제어되어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부언했다. 시장이 오로지 자신의 조정 능력이 아니라 외부의 제어를 통해 운영되고, 그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큰 틀에서 보자면 케인스와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시경제학의 창시자로서 케인스는 사실상 이후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경제학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세부적인 면에서는 각을 세울지라도 그는 분명히 모두에게 존경받는 학자였다. 시카고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로버트 루카스는 “나는 모든 사람이 참호 속에 숨은 케인스주의자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으며, 당대 케인스의 경쟁 상대였던 하이에크조차 “지금 케인스는 세상을 떠나 성인이 되었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케인스는 연구실에만 갇혀 지내는 학자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면 바로 그것이 경제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지프 슘페터에게 “불안정한 일반 이론에 그의 생각과 설명을 덧붙인 특별한 사례들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즉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케인스는 그것이 경제학이 할 일이라고 믿었으며, 그의 실용적인 정책 제안은 공화당 출신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조차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현실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오늘날의 경제 문제를 헤쳐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가 케인스주의자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현재 경제학의 원류가 어디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걸음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되어야 한다.
케인스, 그가 돌아왔다!
케인스 이전과 케인스 이후, 그리고 케인스 사후
케인스 이전, 경제는 생산자와 자본가를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모든 문제가 생산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수요 감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여겨졌고 공급되는 만큼 소비될 수 있다고 봤기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리카도의 “수요는 단지 생산에 의해 제한된다”라거나 세이의 “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변되는 시장의 자기조정 능력에 대한 믿음 역시 확고했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 유례없는 대공황이 닥치면서 이제 주도권은 수요 쪽으로 넘어갔다. 꽁꽁 얼어붙은 경제 시스템에서 수요 측도 공급 측도 손을 쓸 수가 없었고, 그 결과 잉여 생산물은 쌓여만 갔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저축을 할 게 아니라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케인스의 역발상적 주장이 힘을 얻은 것도 이 시기를 지나면서였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케인스의 주장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으로 반영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전쟁 특수를 누리는 과정에서 그의 이론이 현실적으로 입증되었다.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경제가 호황기를 구가하는 동안 케인스주의 역시 주류 경제학으로서 흔들림 없는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조짐을 보임과 함께 케인스식 처방은 힘을 잃게 되었고 그의 이론은 심각한 반론에 맞닥뜨렸다. 밀턴 프리드먼을 필두로 한 경제학자들은 뉴딜 정책이 도리어 시장 자체의 복원력을 방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장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고전적 방식으로의 회귀 논리를 펼쳤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자들까지 합세했고 영국에서는 대처가, 미국에서는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자유시장의 시대가 열렸다. 대표적으로 이들 두 나라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면서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제한하고 시장을 자기조정 능력에 일임했으며, 공공기업의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이에 따라 케인스 이론은 뒷전으로 밀려나 구시대 유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후, 다시 말해 케인스 사후 60여 년 만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이론은 다시 현실로 불려 나왔다. 특히 2008년 세계적 금융 위기가 발발했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는 그전까지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무덤 속 케인스를 다시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 시장이 스스로 체력을 회복하기까지 뒤따라야 하는 희생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 각국의 정부는 케인스식 처방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국, 중국 같은 덩치 큰 국가들만이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는 규제받지 않는 시장의 위험에 대한 케인스의 경고를 따른다는 의미다.
과거의 위기에서 배우지 못하면 더 큰 위기를 향해 갈 수밖에 없으며,
위기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제 이론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의 위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다. 저자는 당시 위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목소리만 큰 경제학자들의 대안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이 합당하게 지워지고 있는지를 신랄하게 파헤친다. 위기의 큰 흐름을 따라 주택 거품과 주식시장 및 상품시장의 붕괴, 은행의 도덕적 해이, 감독기관과 정부의 허술하기 그지없는 정책 수립과 집행을 하나하나 꼬집는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일시적이거나 돌발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 여파가 유럽으로 직행해 유럽 위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또한 세계적인 침체와 저성장기조의 고착화를 부채질했다. 즉, 위기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며, 어쩌면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만약 자본주의 자체의 한계라면 더더욱, 빈발하는 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위기에서 확실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증거는 곳곳에 널려 있다. 위기 수습 기간이던 당시 상황만 봐도 이는 극명해진다. 부실덩어리인 은행들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구제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부실을 키웠던, 적어도 방조했던 금융기관의 고위 임원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인센티브와 은퇴자금을 합법적으로 챙겼다.
경제학 분야의 문제는 특히나 심각하다. 수많은 경제학자가 이 위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을뿐더러 위기가 왜 발생했는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당면한 과제를 케인스의 통찰로 헤쳐 나가고자 하는 요구가 더욱 강해졌다. 즉,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의존해서는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주기적 쇼크를 가하게 된다는 인식이 폭넓게 형성된 것이다.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서술한 경제학,
수치보다 인간 행위에 더 주목한 서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학문은 없다. 경제학은 특히 더 그렇다. 경제 문제에서 최근 부각되는 ‘불평등’이라는 화두 역시 정치적 불평등, 교육 기회의 불평등 등을 벗어나 논할 수 없다. 또한 경제학은 여러 분야에서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뉴턴 물리학의 영향으로 그간의 개념적인 ‘균형’과 ‘최적 상태’ 등의 문제가 계량적, 이론적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수학이 경제학에 편입되면서 어떤 명제를 설정하고 증명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비록 케인스는 경제의 지나친 수학화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말이다. 케인스의 관점에서 경제학은 인간의 삶의 질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의 문제였지 수학적으로 앞뒤가 들어맞는 가정을 세우고 자화자찬하거나 탁상공론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대학 전공을 역사학으로 시작한 역사학자로서, 이 책 역시 그런 관점에서 서술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으로서의 가정이나 이론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행위에 주목하는 경제학적 저서라는 점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2008년의 세계적 금융위기를 중심에 두고, 이러한 위기가 발발한 원인과 당시 대응이 적절했는지, 이에 대한 각 경제학파의 관점은 어떠한지를 살핀다. 특히 현재 세계 경제학파의 두 가지 큰 흐름인 민물학파(신고전주의학파, 일명 시카고학파)와 바닷물학파(신케인스학파)의 가정과 이론을 대비하여 살펴본다. 2부에서는 케인스의 생애를 다룬다. 케인스 전문가로서 저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일상적인 삶과 투자가로서의 성공과 실패, 경제학자이자 경제관료로서 케인스가 잘 그려져 있다. 특히 케인스 혁명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그의 이론이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하고 다듬어졌는지를 깊이 있게 다뤘다.
3부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왜 다시 케인스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지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케인스에게 경제는 단순히 잘살고 못사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다방면의 천재로서, 경제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철학자이자 윤리학자로서도 커다란 발자욱을 남겼다. 당대 대표적인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케인스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날카롭고 명석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와 논쟁을 벌일 때는 사력을 다해야 했고, 논쟁이 끝나면 거의 늘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케인스는 평생 윤리적 목적과 부의 관계를 고민했으며 ‘돈에 대한 사랑’이 ‘선한 삶’으로 이끌 때만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만약 금융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 경제를 낭떠러지로 내몬 금융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낭떠러지에 이르기 전에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오늘날 경제에도 케인스가 필요하다. 케인스의 부활, 더 정확히는 케인스 이론의 재부상을 반기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용되지 않고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득이 되도록 하려면 가장 먼저 케인스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지 않고 케인스를 논한다는 건 난센스라 하겠다.